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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21-35 묵상 —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by 묵상하는 사람 2026. 7. 6.

Living Bible 말씀 묵상 | 마태복음 강해 시리즈 #036


📖 본문 (마태복음 18:21-35, 개역개정)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자와 가진 것을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이와 같이 너희에게 행하시리라


🔍 문맥과 위치

18장은 공동체 강화입니다. 앞서 형제의 죄를 다루는 절차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실제적 질문을 가져옵니다. 얼마나 많이 용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형제 권고 절차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절차대로 했는데도 또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의 응답, 그리고 비유. 이 세 부분이 하나의 흐름입니다. 용서는 의무가 아닙니다. 받은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지 못한 것의 비극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 강해

1.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관대한 제안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질문은 당시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랍비 전통에서는 같은 사람에게 같은 죄를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두 배가 넘는 일곱 번을 제안합니다. 매우 관대한 제안입니다. 어쩌면 예수께 칭찬을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베드로는 완전한 용서를 제안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암묵적 기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응답은 베드로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 — 숫자를 넘어서는 원칙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490번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490번을 세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숫자를 없애신 것입니다. 용서에 한계를 두려는 시도 자체를 끝내십니다.

창세기 4:24를 배경으로 보면 더 선명합니다. 라멕이 말했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일곱 배이면 라멕을 위하여는 일흔일곱 배이리로다." 보복은 일흔일곱 배로 늘어납니다. 예수는 그것을 용서로 뒤집으십니다. 보복이 일흔일곱 배로 늘어나는 것처럼, 용서도 그렇게 늘어나야 합니다.

용서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몇 번째인지 세지 않습니다.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비유로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3. 만 달란트 — 갚을 수 없는 빚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만 달란트는 당시 가장 큰 숫자와 가장 큰 화폐 단위의 결합입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 20년 치 임금입니다. 만 달란트면 20만 년 치 임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이 액수는 의도적 과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무게를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갚을 수 없습니다. 어떤 노력으로도, 어떤 선행으로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종이 엎드려 빕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만 달란트를 갚겠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불쌍히 여겨 탕감합니다. 전액 탕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것.

팀 켈러가 말하듯,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만 달란트 채무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 죄의 크기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때, 받은 은혜의 크기가 느껴집니다.

4. 백 데나리온 — 비교할 수 없는 빚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탕감받은 종이 나갑니다. 그리고 동료를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자.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100일 치 임금입니다. 작지 않은 돈입니다. 실제 삶에서 의미 있는 액수입니다.

그러나 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만 달란트는 6억 데나리온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입니다. 탕감받은 것의 60만분의 1을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종의 행동이 놀랍습니다.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합니다. 동료가 엎드려 빕니다. "나에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주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습니다. 옥에 가둡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받은 은혜를 잊은 것입니다. 탕감받은 순간의 감격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크기와 동료에게 베풀어야 할 용서의 크기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말하듯, 복음을 잊으면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받은 은혜를 잊으면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용서받은 것을 잊으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기억이 용서의 동력입니다.

5. 악한 종아 — 불쌍히 여김의 논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주인의 꾸짖음이 논리적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받은 것이 베풀어야 할 것의 기초입니다. 내가 얼마나 받았는지가 내가 얼마나 베풀어야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구조입니다. 명령이 먼저가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용서하라는 명령이 복음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것이 먼저이고, 그로부터 용서가 흘러나옵니다. 에베소서 4:32는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존 스토트가 강조하듯, 용서는 강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받은 용서의 깊이를 알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용서하기 어려울 때는 내가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6. 마음으로부터의 용서 — 용서의 깊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이와 같이 너희에게 행하시리라."

비유의 결론입니다. "마음으로부터(아포 톤 카르디온, ἀπὸ τῶν καρδιῶν)"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말로 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입으로 "용서한다"고 했지만 마음에 원망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용서입니다.

이것은 요구하기 어렵습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는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경험, 그 은혜의 깊이를 알 때 가능합니다.

마지막 경고가 무겁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 하늘 아버지도 같이 행하신다고. 이것은 용서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용서받음이 진짜였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은혜를 진정으로 받은 자는 은혜를 흘려보냅니다. 주기도문도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프란시스 쉐퍼가 말하듯, 용서는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인 표지입니다. 세상은 공정함으로 움직입니다. 교회는 은혜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 은혜가 용서로 표현됩니다.

더 깊은 묵상을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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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의 적용

이 비유는 오늘 용서하기 어려운 누군가가 있는 분들에게 말합니다.

먼저 내가 만 달란트 채무자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진 빚의 크기를 생각하십시오. 그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탕감의 크기를 아는 자는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변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사과를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용서는 잊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즉시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상대방을 주인의 손에 놓아드리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 놓음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 기도

주님, 내가 만 달란트 채무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탕감받은 그 은혜의 크기를 날마다 새롭게 기억하게 하소서. 그 기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용서로 형제를 용서하게 하소서. 마음으로부터의 용서가 어렵게 느껴질 때,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서게 하소서.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는 삶, 은혜받은 자가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다음 묵상: 마태복음 19:1-15 — 이혼에 관한 가르침,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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