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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7-34 묵상 — 세 번째 수난 예고, 섬기는 자가 크다

by 묵상하는 사람 2026. 7. 7.

Living Bible 말씀 묵상 | 마태복음 강해 시리즈 #040


📖 본문 (마태복음 20:17-34, 개역개정)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언가를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우편과 좌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들이 여리고를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니 맹인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 문맥과 위치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끝났습니다. 은혜의 논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의 결정적 국면에 들어서십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가 나옵니다. 첫 번째(16:21)보다, 두 번째(17:22-23)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능욕, 채찍질, 십자가. 죽음의 방식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직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리를 요구합니다. 예수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자리에서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구합니다. 이 대비가 이 본문의 핵심 긴장입니다. 예수는 낮아짐을 향해 가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짐을 향해 갑니다.

본문은 세 단락입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17-19절), 어머니의 청원과 섬김의 가르침(20-28절), 두 맹인 치유(29-34절). 세 단락이 하나의 주제로 수렴됩니다. 예수가 오신 목적, 섬기는 종으로 오셨다는 것.


✍️ 강해

1. 세 번째 수난 예고 — 가장 구체적인 예고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세 번째 수난 예고는 첫 번째, 두 번째와 다릅니다. 점점 구체화됩니다. 첫 번째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16:21). 두 번째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17:22-23). 이제 세 번째는 넘겨지는 대상(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이방인들), 고난의 방식(능욕, 채찍질), 죽음의 방법(십자가)까지 명시됩니다.

예수는 아셨습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능욕을 아셨습니다. 채찍질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가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주도적으로 가십니다.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가십니다.

이것이 대속의 깊이입니다. 모르고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7의 성취입니다. "그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존 스토트가 말하듯, 십자가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가 선택하신 일입니다.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죽음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예고 안에 부활이 함께 있습니다. 십자가의 어두움이 부활의 빛으로 이어집니다. 이 패턴이 제자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낮아짐이 높아짐으로, 섬김이 영광으로.

2.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하소서 — 엇갈린 요청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수난 예고 직후 이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어머니가 아들들의 자리를 구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 뒤에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35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 자신들이 직접 구했습니다. 어머니는 대리인이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그들은 예수의 나라를 이해했습니다. 그 나라가 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를 몰랐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우편과 좌편은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들은 영광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영광으로 가는 길이 고난임을 몰랐습니다.

예수의 응답이 예리합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모릅니다. 영광을 구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십자가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편과 좌편에 앉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잔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구약에서 진노와 고난을 가리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실 그 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자신감이 무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자신감을 꺾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그들이 실제로 그 잔을 마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 처음으로 순교했습니다(행 12:2). 요한은 오랜 박해와 유배를 겪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잔을 마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대함은 고난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원했던 것을 결국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 달랐습니다.

3. 열 제자가 분히 여기거늘 — 모두의 문제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열 제자가 분노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구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자신들도 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를 원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차지하려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아십니다. 두 형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열두 제자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닙니다. 전체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높아지려는 욕망은 두 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더 중요한 역할을 맡느냐, 누가 더 인정받느냐. 이 싸움은 예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습니다.

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두 나라의 원리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예수는 두 종류의 나라를 대비하십니다. 이방인의 나라와 천국. 이방인의 나라는 권세를 위에서 아래로 행사합니다. 집권자가 주관하고, 고관이 권세를 부립니다.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립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이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닙니다. 권력의 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반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는 위대함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크고자 하는 욕망을 나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위대함의 방법을 바꾸십니다. 섬김이 위대함의 길입니다. 종이 되는 것이 으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와 정반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 권고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조에 대한 선언입니다. 세상의 구조를 뒤집는 혁명적 원리입니다. 그 원리를 몸으로 보여주실 분이 다음에 나옵니다.

5.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섬김의 절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한 문장이 마태복음 전체의 핵심입니다. 아니, 복음 전체의 핵심입니다. 예수가 오신 목적이 여기 있습니다.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함.

"대속물(뤼트론, λύτρον)"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한 몸값입니다. 구약에서 포로를 석방하거나 종을 자유롭게 할 때 치르는 값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그 값으로 치르십니다.

"많은 사람의." 이사야 53:11-12의 언어입니다. "많은 사람의 죄악을 담당하며." 예수의 죽음은 개인적 비극이 아닙니다. 우주적 구원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절정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종이 되는 것. 그 섬김의 최고 형태가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섬기라고 명령하시면서 자신이 먼저 그 섬김을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십자가가 그 섬김의 완성입니다.

기독교 리더십은 세상의 리더십과 다릅니다. 군림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그 섬김의 모델이 예수 자신입니다. 섬기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그분이 먼저 가셨습니다.

6. 두 맹인의 외침 — 예루살렘 직전의 마지막 치유

"맹인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여리고를 떠날 때입니다. 맹인 둘이 길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볼 수 없지만 들었습니다.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그리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 외침이 의미심장합니다. 맹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9:27에서도 두 맹인이 같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가 누구신지를 봅니다. 보는 자들보다 더 잘 봅니다.

무리가 꾸짖습니다. 잠잠하라고 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맹인들이 방해입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더욱 소리를 지릅니다. 막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더 간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끈질김입니다. 장벽이 외침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예수가 멈추십니다. 길을 멈추실 이유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멈추셨습니다. 두 맹인의 외침이 예수를 멈추게 했습니다. 아무리 바쁜 길도, 아무리 중요한 목적지도, 고통받는 자의 외침 앞에서 예수는 멈추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이 반복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20절). 그러나 그 대답과 이 대답이 다릅니다. 어머니는 자리를 구했습니다. 맹인들은 눈 뜨기를 원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맹인들의 진정한 필요였습니다. 자리가 아닙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 장면이 본문 전체를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보면서 보지 못했습니다. 맹인들은 보지 못하면서 더 잘 보았습니다. 눈을 뜬 후 그들이 한 일이 예수를 따른 것입니다. 섬김의 가르침이 여기서 실현됩니다. 자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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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의 적용

이 본문은 오늘 두 가지 방향에서 묻습니다.

첫째, 나는 자리를 구합니까, 아니면 섬김을 구합니까. 야고보와 요한처럼, 우리도 은밀히 높은 자리를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 오늘 내가 섬기는 방식으로 위대함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둘째, 나는 무엇을 구합니까. 예수가 묻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들은 솔직했습니다. 눈 뜨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 앞에서 나의 진짜 필요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자리입니까, 아니면 눈 뜨기입니까.

인자가 오신 것은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 하심입니다. 그분의 섬김이 나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 자유가 나를 섬기는 자로 살게 합니다. 받은 섬김이 베푸는 섬김의 동력입니다.


🙏 기도

주님, 오늘도 높은 자리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솔직히 드러내 주소서. 야고보와 요한처럼 잘못 구하지 않게 하시고, 섬기는 자가 크다는 천국의 원리를 삶으로 살게 하소서. 인자가 섬기러 오셨고 대속물로 목숨을 주셨음을 오늘도 기억하게 하소서. 그 섬김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오늘 내 자리에서 섬기게 하소서. 눈 뜨기를 원했던 맹인들처럼 주께 솔직하게 나아가고, 눈이 열린 후 주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다음 묵상: 마태복음 21:1-22 — 예루살렘 입성, 성전 정화, 마른 무화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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